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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공부

한국사 정리 - 고려의 건국과 귀족 사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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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이후 기울어진 전세를 이어 후백제와 후 고구려를 내세워 견훤과 궁예가 각각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후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옮기고 태봉으로 국호를 고쳤으나 미륵신앙을 이용한 전제 정치로 민심을 잃고 후에 송악 출신 왕건이 왕으로 추대 받게 됩니다. 

고려의 건국과 후백제 통일신라 상황

이후 왕건은 호족 세력을 통합하며 백제와 경쟁하였고, 후백제는 이런 와중 왕위 계승권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견훤은 금산사에 감금당했고, 이후 탈출해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신라 먼저 항복을 하였고, 고려는 심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한편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했고, 발해 유민들을 포용해 실질적인 민족 대통일을 이뤄냈습니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해 북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한편 호족의 세력을 뒤에 업고 통일을 하였으며, 해당 세력은 4대 광종에 가서야 약화된다. 태조는 호족의 딸과 결혼하거나 '왕'씨 성을 하살하여 호족세력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은 점점 커집니다. 

항상 보면 정권이 바뀌면 정권이 바뀌는데 도움을 준 세력은 항상 점점 성장을 하며 세력이 강해지는듯합니다. 특히 태조는 개국 공신에게 역분전을 지급하였습니다. 

역분전이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신하, 군인을 대항으로 고려 초에 시행한 토지 분급 제도입니다. 

한편 태조는 이런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인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두었습니다. 

기인제도란 지방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삼아 수도인 개경에 머물게 한 제도이며, 
사심관제도는 지방 출신 고관을 출신 지역 사심관으로 임명해 치안 유지등을 하게 한 제도입니다. 

태조는 전쟁이후 각박해진 민생의 안정을 위해 세율을 1/10으로 정하고 빈민 구제 위한 흑창을 운영하였습니다. 

2대 3대 혜종과 정종은 외척 세력이 개입된 왕위 계승으로 고전하지만 4대 광종은 호족세력을 누르기 시작했으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풀어줘 호족세력을 약화시켰으며, 과거제를 실시해 유학자를 대거 선발하였으며 음서제도를 견제하였습니다. 또한  황제칭호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로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음서제란 과거를 통해 선발하지 않고 추천제로 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호족세력과 유학자들의 세력이 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드렸습니다. 

 

다음번 포스팅은 문벌귀족 사회와 무신정권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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